베란다 건조대 밑…그 아이의 ‘외딴 방’

2019. 4. 11. 09:15사회.복지

 

시흥 526가구 아동주거 실태조사

 

애절한 팻말 시흥시 반지하 가구 창문 앞에 "애가 자고 있어요 여기에 주차하지 말아요"라는 팟말이 세워져 있다. 고희진기자

 

[경향신문 고희진 기자]  “ ‘잠은 어디서 자냐’는 물음에 한 아이가 베란다 문을 열었다. 작은 원룸형 집엔 4인 가족이 다 잘 공간이 없었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가기도 어려운 공간에 아이 두 명이 이불 하나를 두고 생활했다.”

 

한국에서 아동주거 빈곤 비율이 가장 높은 경기 시흥시 정왕본동 일대 원룸촌에 사는 아이의 얘기다. 한국도시연구소가 지난해 하반기 정왕동 일대 526가구(19세 미만 자녀를 둔 가구)를 대상으로 벌인 아동주거 실태조사·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아동주거에 초점을 맞춘 국내 실태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보고서엔 방이 비좁아 건조대 밑에서 잠을 자고, 집안일을 도와주고 싶어도 주방이 좁아 함께할 수 없어 불편하다는 아이들 이야기가 실렸다.

 

봄비가 내린 10일 보고서에 나온 정왕본동 일대 원룸 주택가를 직접 찾았다. 건물 사이 좁은 골목마다 어린이용 자전거와 유모차가 세워져 있었다. 빗물이 자전거의 녹슨 안장과 바큇살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왕지구 지구단위계획 시행지침에는 단독주택 필지에 다가구주택은 필지당 6가구로 지어야 한다. 그러나 불법 쪼개기로 이 지역 원룸 빌딩 한 동엔 보통 15~20여가구가 산다. 비좁은 집 안과 공동 현관에 자전거나 유모차를 보관할 수 없다.

 

골목 하나를 돌자 반지하 주택 앞에 세워진 팻말이 눈에 띈다. 팻말엔 ‘애가 자고 있어요. 여기에 주차하지 말아요. 조심’이라고 적혀 있다. 건물 화단엔 꽃이 아니라 쓰레기와 빈 소주병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 지역 아이들은 사교육이나 여가활동 기회가 많지 않다. 평일 기준 16.3시간을 집에서 지낸다. 방학이나 주말에는 평균 21시간 집 안에 머문다. 아이들은 비좁은 집에 머무느니 넓은 운동장이 있는 학교로 가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긴다. 여름·겨울 방학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실태조사에 참여한 한국도시연구소 정진선 연구원은 “원룸에 사는 아이들은 집에서 책상을 놓고 공부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다”며 “방과 후 아이들은 집에서 스마트폰만 보거나 PC방에 가는 게 전부”라고 했다. 정 연구원은 ‘아동 먼저(child first)’라는 주거정책의 원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주거기본법은 청년, 신혼부부, 노인 등 일부 계층을 주거 지원 대상에 포함하지만 외부 환경에 가장 취약한 ‘아동’은 그 대상이 아니다.

 

실태조사는 아동주거와 빈곤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작했다.

연구소는 시흥시 정왕1·3동과 정왕본동 지역 526가구의 주거 환경을 조사했다. 가구 형태는 부모·자녀로 구성된 가구가

 

73.0%, 한부모가정이 17.5%였다. 중위소득 60% 이하 가구에서 한부모가정(26.6%)과 조손·소년소녀가정(3.1%)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다문화·외국인 가구도 많았다. 구성원 수는 3인(49.4%), 4인(28.7%), 5인 이상(12.2%), 2인(9.7%) 순이었다. 저소득층이 많아 수급 가구 비율은 18.3%로 2016년 시흥시 전체 수급 가구 비율 3.3%보다 크게 높았다.

 

이들의 평균 주거면적은 42.6㎡(약 12.8평)다. 주거면적이 40㎡ 미만 가구도 전체의 52.3%에 달했다. 시흥시 전체 가구 중 40㎡ 미만 거주 비율 30.8%(2014년 기준)보다 높은 수치다. 한 가구당 사용 방 개수는 ‘잠을 자는 방’이 평균 1.92개다. 서재·옷방 등 기타 용도로 사용하는 방을 둔 가구는 거의 없었다.

 

실태조사에 응한 한 아동은 “빨래건조대 밑에서 자야 하는데 빨래랑 건조대에 부딪쳐서 불편하다”며 “엄마가 요리할 때 도와드리려 해도 주방이 좁아서 불편하다”고 말했다. 주방과 거실, 침실을 분리하기 어려운 원룸형 주택에서는 신발이나 쓰레기통을 놓아두는 현관과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와 함께 생활하는 가정은 육아용품 등을 수납할 공간이 필요하지만, 이 역시 부족하다.

 

단열 등 주택 공사가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곳도 많다. 자녀 두 명과 원룸형 주택에서 거주하는 한 보호자는 “창문이 서로 맞지 않아서 겨울에 외풍이 들어온다. 문풍지를 발라놔서 조금 낫긴 한데 난방비가 너무 부담되고 무서워서 보일러는 잘 틀어놓지 않는다”고 말했다.

봄·여름이 되면 해충 문제도 심각하다. 한 조사원은 “설문조사 답례품으로 상품권 대신 바퀴벌레 약을 사다 드리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며 “아이가 바퀴벌레가 너무 많다고 계속 얘기한다. 하수구를 통해 쥐가 들어오기도 한다더라”고 전했다.

 

정왕본동은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아동주거빈곤 비율이 69.4%로 전국 3472개 읍·면·동 중 가장 높았다. 시화·오이도 등 주변 공업단지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이들이 값싼 원룸형 주택이 밀집한 정왕본동 일대에 모였기 때문이다. 값이 저렴한 대신 원룸 대부분이 불법적으로 내부 구조를 변경해 타 지역보다 평수가 적다.

 

이 같은 원룸형 주택의 가구주는 주로 아동·청소년 자녀와 함께 사는 30~40대다. 성장기 아동은 성인보다 주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조사에 참여한 아동·청소년들은 가장 큰 불만 사항으로 ‘비좁음·개인공간 부족’(35.6%)을 꼽았다. ‘해충 및 위생 상태’(16.1%) 불만도 컸다. 연구원들은 부모와 함께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고 옷을 갈아입는 일이 아이들에게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 또한 후순위로 밀리기 쉽다. 실태조사에 참여한 한 부모는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방음이 안돼서 뛰어놀지도 못하다 보니까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아이 성질이 좀 사나워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좁은 길에 원룸형 빌딩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에 있는 운동장 외에는 공원같은 넓은 공간을 찾기 어렵다.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더라도 안전하게 놀 곳이 없다면 비행의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아동주거 문제가 심각해지자 시흥에선 2017년 5월부터 ‘정왕지역 아동주거환경개선네트워크’가 활동에 들어갔다. 정왕본동, 정왕1동 및 오이도 지역의 아동주거 빈곤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정책·사업 발굴을 위한 민관 네트워크에 총 19개 단체가 함께했다. 시흥시는 현재 ‘시흥형 주거복지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아동이 있는 가구에 대한 수급 지원을 강화하고, 이들에게 책상이나 침대를 지원하는 사업도 실시 중이다. 이번 보고서도 지역 사회단체와 시흥시의 발주로 시작됐다.

 

사회적협동조합 시흥주거복지센터 차선화 센터장은 “지역이 열악하면 복지문화 인프라도 열악할 수밖에 없다”며 “현재 방과후센터, 청소년 문화의 집, 복지관, 지역아동센터 등이 운영 중이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아, 시흥시와 함께 새로운 아동·청소년을 위한 복합센터 신축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영국 등에서는 주거 지원에서 ‘아동 먼저(child first)’ 원칙을 지키기 위한 제도를 실시 중이다. 영국은 2004년 주택법(Housing Act 2004)을 강화하면서 ‘주택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평가 체계(Housing Health and Safety Rating System, HHSRS)’를 도입했다. HHSRS에는 아동이 있는 가구에 대한 주의 사항이 별도로 명시됐다. 거주 환경이 인간의 정서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고 그중 성장기 아동에게 끼치는 영향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한국도 급속한 도시화로 서울·경기 지역에 인구 유입이 늘어나며 도심 주거 빈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노인, 청년 등에 대한 지원이 늘고 있지만 아동 지원 정책은 많지 않다. 아동은 선거권조차 없다 보니 이들에 대한 복지정책은 정치적인 의제로도 쉽게 떠오르지 못한다.

 

한국도시연구소 최은영 소장은 “정부가 저출산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최근 주거복지 로드맵도 신혼부부나 청년 위주로 맞춰가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아동, 아동과 함께 거주하는 중·장년층에 대한 지원이 배제되는 일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최 소장은 “아이들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저출산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며 “아동의 주거 환경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더욱 늘어나야 할 때”라고 말했다